빌베리(bilberry)를 검색하면 꼭 따라붙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 조종사들이 야간 폭격 성공률을 높이려 빌베리 잼을 먹었다'는 설화입니다. 80년 넘게 반복된 이 이야기, 실제로는 근거가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빌베리 안토시아닌(anthocyanin)이 눈의 로돕신(rhodopsin) 재생을 돕는다는 기전 자체는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이 기전이 실제 야간시력 개선으로 이어지는지를 본 최근 임상들은 건강한 성인에게서 뚜렷한 효과를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설화와 기전, 임상 결과를 하나씩 구분해서 보겠습니다.
조종사 설화, 사실은 레이더를 감추기 위한 위장이었다
이 이야기의 출처를 추적하면 실제 역사 기록과는 다릅니다. 캐나다 맥길대학교(McGill University) 과학평가팀에 따르면, 이 설화는 당시 영국군이 새로 개발 중이던 레이더 기술을 적국에 들키지 않기 위해 퍼뜨린 위장 선전(cover story)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조종사들의 실제 야간 성과는 빌베리가 아니라 레이더 덕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빌베리 잼 이야기는 그 진짜 기술을 감추기 위한 이야기였다는 뜻입니다.
기전은 그럴듯합니다: 로돕신과 저조도 시력
안토시아닌이 눈에서 주목받는 이유 자체는 근거가 있습니다. 망막의 간상세포(rod cell)에는 로돕신이라는 단백질이 있는데, 이 단백질이 어두운 곳에서 빛을 감지하고 다시 재생되는 과정이 야간시력에 관여합니다. 빌베리의 안토시아닌이 이 로돕신 재생을 생화학적으로 지원하는 기전이 실험 수준에서 확인돼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대상 임상은 다른 결과를 보였습니다
문제는 이 기전이 실제 사람의 눈에서 체감할 수 있는 시력 개선으로 이어지느냐입니다. 코크란(Cochrane) 체계적 고찰이 정리한 최근 무작위 대조 시험(RCT) 4건은 모두 건강한 성인의 정상 야간시력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개선하지 못했습니다. 기전은 실험실에서 확인됐지만, 사람이 실제로 어둠 속에서 더 잘 보게 된다는 증거로는 이어지지 않은 셈입니다. 코크란 체계적 고찰은 여러 연구를 종합한 결론이라 개별 연구보다 근거 피라미드에서 신뢰도가 더 높게 인정됩니다.
다만 한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연구들이 포함된 12개 연구 중 11개가 정상이거나 평균 이상의 시력을 가진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야맹증이 있거나 어두운 환경 적응이 필요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는 '건강한 사람에게 효과가 없다'는 결론이지, '시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에게도 반드시 효과가 없다'는 뜻까지는 아니라서, 지금 근거로는 판단을 유보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긍정적으로 보이는 연구들은 왜 다를까
반면 무작위 배정이 없는 비RCT 연구 7건 중 일부는 긍정적인 결과를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연구들은 맹검화(눈가림) 부족, 소규모 표본, 높은 탈락률 같은 방법론적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참가자가 자신이 진짜 성분을 먹었다는 걸 알고 있으면 실제 효과가 없어도 좋아졌다고 느끼는 효과가 섞일 수 있어, 임상 근거로는 RCT 결과를 우선 참고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럼 빌베리는 아예 의미가 없을까
'기전은 있지만 사람 임상에서는 증명되지 않았다'는 결과를 두고 '완전히 헛소문'이라고 단정하기도, '과학적으로 증명된 효능'이라고 광고하기도 둘 다 정직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까지 근거로는 건강한 사람의 야간시력 개선 효과가 확인되지 않았을 뿐이고, 야맹증이 있거나 특정 눈 질환이 있는 사람에 대한 근거는 아직 충분히 조사되지 않은 영역입니다.
야간 운전이 불편하다면 이렇게 접근하세요
밤에 운전할 때 눈이 유독 부시거나 사물이 잘 안 보인다고 느끼신다면, 빌베리 보충제로 접근하기 전에 원인부터 짚어보는 편이 순서에 맞습니다. 백내장, 굴절 이상, 안경 도수 변화처럼 실제 시력 문제가 원인인 경우가 많고, 이런 경우 보충제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식품으로 먹는 안토시아닌, 그리고 라벨에서 확인할 것
빌베리 보충제의 임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식품 자체를 피할 이유는 없습니다. 빌베리와 같은 부류인 블루베리 등 짙은 보라색 베리류에는 안토시아닌이 풍부하며, 식품으로 즐기는 것은 특별한 위험 없이 시도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보충제를 고르실 때는 특정 함량 숫자보다 성분표가 투명하게 공개돼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시길 권합니다. 표준화 비율이나 임상 용량을 라벨과 정확히 대응시킬 근거는 이번 조사에서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국내 식약처가 인정하는 기능성 표현은 질병 예방·치료로 오인되지 않는 범위로 제한되는데, 빌베리에 대한 구체적 인정 문구는 확인하지 못했으니 '야간시력 개선'을 단정하는 제품이라면 공식 인정 여부부터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나에게 필요할까: 자가 판단
야간시력 문제로 불편함을 느끼고 계시다면, 먼저 아래 기준으로 스스로 점검해보시길 권합니다.
안과 진료가 필요한 신호
야간에 특히 잘 안 보이는 증상 외에, 시야 일부가 갑자기 어두워지거나 빛 번짐이 심해지거나 물체가 이중으로 보인다면 이는 보충제로 접근할 문제가 아닙니다. 백내장, 녹내장, 망막 질환 등은 방치하면 진행될 수 있으니 이런 증상이 있다면 지체 없이 안과 진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광고에서 검증된 것처럼 포장된 이야기라도, 원출처를 따라가 보면 이번 빌베리처럼 결이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성분 자체를 완전히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전설적인 스토리텔링보다는 실제 임상이 어디까지 확인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하시길 권합니다.

